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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이 왔을 때 내가 한 것들

August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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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에 맥북을 열었는데 코드를 치고 싶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나는 코드 치는 게 좋아서 이 일을 시작한 사람이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고, 주말에 새로운 라이브러리 나오면 만져보는 게 재미있었다. 그런 내가 VS Code 창을 띄워놓고 커서만 깜빡이는 걸 5분 동안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번아웃이라는 걸.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

돌이켜보면 신호는 몇 달 전부터 있었다. 당시 팀에서 대규모 리뉴얼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다. 기존 서비스를 Next.js로 마이그레이션하면서 동시에 신규 기능도 추가해야 했다. 릴리즈 일정은 8주. 어떻게 봐도 12주짜리 작업이었는데 비즈니스 쪽에서 이미 날짜를 잡아버렸다.

야근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이번 스프린트만" 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 스프린트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9시, 10시에 퇴근하는 게 당연해졌다. 주말에 슬랙 알림이 울리면 반사적으로 확인했다. "혹시 프로덕션 장애일 수도 있으니까"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는데, 실제로 긴급한 건 열 번에 한 번 정도였다. 나머지 아홉 번은 다음 주에 봐도 되는 것들이었다.

문제는, 쉬는 시간에도 머릿속이 코드였다는 거다. 샤워하면서 컴포넌트 구조를 생각하고, 자기 전에 "내일 저 API 연동 어떻게 하지" 고민하고, 꿈에서 git conflict를 해결하고 있었다. 몸은 퇴근했는데 뇌는 아직 회사에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코드 리뷰가 짜증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동료가 남긴 코멘트를 보면 "아 그렇네" 하고 배웠는데, 그때는 "이걸 왜 지적하지, 동작하잖아"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PR을 올리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커밋 메시지도 대충 썼다. fix, update, wip. 그전까지 나는 커밋 메시지를 꽤 성의 있게 쓰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그 아침이 온 거다. 맥북 앞에 앉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침.

"쉬면 되지"라는 말의 함정#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피곤해서 그런 거다. 주말에 푹 쉬면 괜찮아질 거다.

금요일 저녁, 의식적으로 노트북을 닫았다. 토요일은 늦잠 자고, 넷플릭스 보고, 낮잠도 잤다. 일요일도 비슷하게 보냈다.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했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슬랙을 열었는데 읽지 않은 메시지가 43개였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리에 앉아서 모니터를 켜는데 지난주랑 똑같은 느낌이었다. 쉬었는데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코딩을 "재미있게" 하면 되지 않을까. 주말에 간단한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요즘 핫한 라이브러리를 써서 뭔가 만들어보자. 예전에는 이런 게 최고의 충전이었으니까.

30분 만에 닫았다. npm create를 치고 프로젝트 구조가 생성되는 걸 보는 순간 피로감이 밀려왔다. 또 컴포넌트, 또 상태 관리, 또 API 호출. 업무에서 매일 하는 것들이었다. 놀이가 아니라 초과 근무 같았다.

이때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다. 쉰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게 있다.

코드와 전혀 관계없는 것들#

전환점은 사소한 데서 왔다. 어느 일요일 오후, 할 게 없어서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요리를 해봤다. 유튜브에서 파스타 레시피를 검색해서 따라 만들었다. 올리브 오일에 마늘을 볶을 때 나는 소리, 면이 익어가는 과정, 접시에 담았을 때의 모양. 40분 동안 코드는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다.

먹어보니 맛있었다. 이게 중요하다. 결과물이 바로 눈앞에 있고, 바로 맛볼 수 있고, 그걸로 끝이다. 배포할 필요도 없고, 코드 리뷰를 받을 필요도 없고, 장애가 날 일도 없다. 완결된 경험.

그 다음 주에는 동네 뒷산에 올라갔다. 등산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왕복 1시간짜리 야트막한 산이었다. 올라가면서 숨이 차고 다리가 뻐근한데, 신기하게 머리는 비어 있었다. 정상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내려왔다. 집에 돌아오니 기분이 이상하게 개운했다.

주중에는 퇴근하고 만화를 읽었다. 예전에 좋아했는데 언제부턴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안 읽고 있었다. 한 권을 집어 들었는데 멈출 수가 없어서 새벽 1시까지 읽었다. 다음 날 졸렸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좋았다.

이런 것들이 쌓이면서 뭔가가 달라졌다. 월요일 아침이 여전히 반갑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가슴이 답답하지는 않았다. 코드를 볼 수 있게 됐다.

슬랙 알림을 껐다#

알림을 끄는 건 생각보다 큰 결심이 필요했다.

"내가 안 보면 장애 대응이 늦어지면 어쩌지." "팀에서 나한테 필요한 게 있는데 답을 안 하면 어떡하지." "내가 슬랙을 안 본다는 걸 알면 성의 없어 보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돌았다. 근데 가만히 따져보면 말이 안 되는 것들이었다. 장애 대응에는 on-call 로테이션이 있었고, 내 담당이 아닌 날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팀에서 급한 게 있으면 전화가 온다. 슬랙 안 본다고 회사가 망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퇴근 후에는 슬랙 알림을 끄기로 했다. 7시 이후에는 확인하지 않는다. 주말에도 마찬가지다.

처음 이틀은 불안했다. 폰을 자꾸 들어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셋째 날부터 익숙해졌다. 일주일이 지나니까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에 밀린 메시지를 확인해보면 — 긴급한 건 하나도 없었다.

의외의 부수 효과가 있었다. 저녁 시간이 진짜 내 시간이 됐다. 예전에는 TV를 보면서도 옆에 슬랙을 켜놓았으니까, 온전히 쉬는 게 아니었다. 반쯤은 일하는 상태. 알림을 끄니까 저녁이 비로소 저녁이 됐다.

팀 리드에게 말한 것#

제일 어려웠던 건 이거다. 힘들다고 말하는 것.

개발자, 특히 주니어에서 갓 벗어난 시점의 개발자에게 "일이 힘들어요"는 "제 실력이 부족해요"처럼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아 보이는데 나만 버거워하는 것 같고. 그래서 꾹 참고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스프린트 회고에서 팀 리드가 각자 컨디션 점수를 매겨보자고 했다. 10점 만점에. 다들 6, 7점을 매겼다. 나는 고민하다가 4점을 적었다. 팀 리드가 회고 끝나고 1:1을 잡았다.

"요즘 어때?"

이 질문에 "괜찮아요"라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안 괜찮으니까 4점을 적은 거잖아. 그래서 그냥 말했다. 아침에 코드를 보기가 싫을 때가 있다고. 주말에 쉬어도 월요일에 나아지지 않는다고. 재미있던 게 재미없어졌다고.

팀 리드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놀라지 않았다. "나도 3년 차 때 비슷했어"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번 스프린트에서 내 태스크를 줄여줬다. "이번 주는 이것만 해. 나머지는 내가 분배할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한 뒤로 달라진 게 있다. 일의 양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건 혼자 끌어안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었다. 힘든 걸 숨기느라 쓰는 에너지가 생각보다 크다. 그 에너지를 안 쓰게 되니까 조금씩 숨통이 트였다.

"일만 하는 상태"의 결과#

번아웃에서 빠져나오면서 가장 크게 바뀐 생각이 있다.

예전에는 번아웃을 "일을 못 하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멘탈이 약하거나, 체력이 딸리는 사람에게 오는 거라고. 그래서 나한테 오면 안 되는 거라고.

근데 번아웃은 "일만 하는 상태"가 지속된 결과다. 일을 못 해서 오는 게 아니라, 일 밖의 것들이 사라졌을 때 온다. 나의 경우 코딩이 일이자 취미이자 정체성이었다. 모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고 있었던 셈이다.

바구니 하나가 무거워지면 전부 무너진다.

요리하고, 산에 오르고, 만화를 읽으면서 바구니를 늘린 거다. 코딩 말고도 나를 채우는 것들이 있다는 걸 다시 발견한 과정이었다. 대단한 취미가 아니어도 된다. 코드와 관계없는 무언가. 결과를 측정할 필요 없는 무언가.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무언가.

지금은#

완벽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지금도 번아웃의 기미는 주기적으로 온다. 큰 릴리즈 전에, 야근이 며칠 이어질 때, 피드백 없이 혼자 작업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 완전히 막을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이 업계에서 일하는 한 어느 정도는 같이 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신호를 알아보게 됐다. 커밋 메시지가 대충 써지기 시작하면. 코드 리뷰에서 짜증이 먼저 나면. 주말에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이런 것들이 보이면 "아, 오고 있구나" 하고 인지한다.

인지하면 대응할 수 있다. 알림을 끄고, 저녁을 비우고, 산에 가고, 필요하면 팀에 말한다. 매번 잘 되는 건 아니다. 타이밍을 놓칠 때도 있다. 하지만 첫 번째 번아웃 때처럼 "이게 뭐지,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지" 하면서 몇 달을 보내지는 않는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지금 비슷한 상태인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아침에 코드가 보기 싫고, 쉬어도 안 나아지고, 예전에 재미있던 게 재미없어진 상태. 하나만 말하고 싶다. 그건 당신 탓이 아니다. 그리고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