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첫 달 월급이 들어왔을 때 통장을 열어보고 "어?" 했다. 연봉을 12로 나눈 금액이 아니었다. 세금, 4대 보험, 기타 공제를 빼고 나니까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실수령액이라는 개념을 그때 처음 체감했다. 대학교 때 연봉 계산기를 돌려봤을 때와 달랐다. 계산기는 세전이었고 통장은 세후였다.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기술 얘기는 하루 종일 한다. 근데 돈 얘기는 잘 안 한다. 연봉이 얼마인지, 주식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이직할 때 협상을 어떻게 하는지. 이런 주제가 나오면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돈은 일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데, 그게 왜 말하기 어려운 주제인 걸까.
같은 역할, 3배의 차이
이직을 준비하면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같은 "프론트엔드 시니어" 타이틀인데, 회사에 따라 총 보상이 3~4배 차이 난다. 이건 느낌이 아니라 데이터가 있는 이야기다.
테크 업계 보상 구조를 연구하는 한 엔지니어 출신 저자가 이런 개념을 제시한 적이 있다. 기업의 보상 체계가 대략 세 개의 층으로 나뉜다는 거다.
첫 번째 층. 소프트웨어가 핵심이 아닌 회사의 IT 부서, 작은 스타트업의 초기 단계. 개발자를 비용으로 본다. 여기서 시니어 프론트엔드의 연봉이 X라고 하자.
두 번째 층. 기술 기반 중견 회사, 성장기 스타트업, 잘 나가는 국내 IT 기업. 개발자를 성장 동력으로 본다. 여기서 같은 역할의 보상이 1.5X~2X 정도.
세 번째 층. 글로벌 빅테크, 잘 나가는 외국계 기업. 개발자를 핵심 경쟁력으로 본다. 여기서 같은 역할의 보상이 3X~4X.
같은 기술 스택, 같은 경력 연차, 비슷한 업무를 하는데 회사가 어느 층에 속하느냐에 따라 보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걸 모르면 자기 시장 가치를 심각하게 오판할 수 있다.
커뮤니티에서 "연봉 얼마 받는다"는 글을 볼 때 위축될 필요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 번째 층에 있는 사람이 자기 보상을 공유하면 그게 평균처럼 보인다. 근데 그건 세 번째 층의 평균이지 업계의 평균이 아니다. 연봉이 높은 사람이 글을 더 많이 쓰니까 선택 편향이 생긴다.
중요한 건, 이 세 개의 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원한다면 위의 층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도.
RSU라는 이름의 함정
IT 업계에서 총 보상(Total Compensation)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나오는 게 RSU(양도제한조건부주식)다. 기본 연봉은 비슷한데 RSU를 많이 붙여서 총 보상을 키우는 구조. 4년에 걸쳐 베스팅되는 조건으로.
RSU에는 함정이 있다.
첫째, RSU는 확정 수입이 아니다. 주가에 연동된다. 입사할 때 주가 10만 원 기준으로 100주를 받았다고 하자. 연 25주씩 베스팅. 1년 후 주가가 5만 원이면? 기대했던 가치의 절반이다. 반대로 20만 원이 되면 2배지만, 어느 쪽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둘째, 베스팅 시점에 세금을 낸다. RSU가 베스팅되면 그 시점의 시가로 근로소득세가 부과된다. 주식이 현금이 아닌데 현금처럼 세금을 매기는 거다. 주가 10만 원짜리 25주가 베스팅되면 250만 원이 소득으로 잡히고, 그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야 한다. 근데 주식을 안 팔았으니까 세금은 현금으로 내야 한다. 주식을 팔아서 세금을 내면 남는 주식이 줄어든다.
셋째, 4년 베스팅은 곧 4년 잠금이다. 1년 차에 퇴사하면 나머지 3년분은 증발한다. 이게 설계된 금덩이 수갑이다. 회사가 마음에 안 들어도 "RSU가 아까워서" 남게 된다. 커리어 결정을 보상이 아니라 성장 기준으로 해야 하는데, RSU가 그 판단을 왜곡한다.
스톡옵션은 또 다른 이야기다. 스타트업에서 주는 스톡옵션은 특정 가격에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인데, 회사가 상장하거나 인수되지 않으면 행사할 데가 없다. 종이 위의 숫자일 뿐. 물론 잘 되면 대박이다. 근데 스타트업의 대부분은 잘 안 된다. 이건 복권과 비슷한 면이 있다. 스톡옵션의 기대값을 0으로 놓고 다른 조건을 평가하는 게 현실적이다.
돈에 대한 심리
돈에 대한 글을 많이 쓰는 한 금융 칼럼니스트의 글 중에 이런 취지의 문장이 있었다. "부자처럼 보이려고 돈을 쓰면, 진짜 부자가 될 확률은 낮아진다." 쓰는 돈이 늘면 모으는 돈이 줄고, 모으는 돈이 줄면 부의 증가 속도가 느려지고, 그러면 더 오래 일해야 하고. 악순환이다.
이걸 개발자 문화에 적용하면 보이는 게 있다. 맥북 프로 최고 사양, 최신 아이폰, 기계식 키보드 3개, 모니터 2대, 스탠딩 데스크. 개발자 사이에서 장비에 돈 쓰는 게 일종의 문화처럼 되어 있다. 물론 장비가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 건 맞다. 근데 솔직히, 키보드를 3개 살 필요는 없었다. 쓰는 건 하나인데. 나머지 두 개는 "개발자니까 키보드 좀 써봐야지"라는 심리로 산 거다.
그 칼럼니스트의 다른 글에서는 이런 개념도 있었다. 부를 쌓는 유일한 방법은 자존심과 수입 사이에 간격을 두는 거라고. 돈을 벌 수 있는 능력과 돈을 쓰고 싶은 욕구 사이의 차이가 저축이고, 저축이 부의 원천이라고. 연봉이 올라도 생활 수준을 같이 올리면 순자산은 제자리다.
이 원리가 개발자한테 특히 위험한 이유가 있다. 이직할 때마다 연봉이 크게 점프하는 업계 특성 때문이다. 3,000에서 4,500으로, 4,500에서 6,000으로. 올라갈 때마다 생활 수준을 맞추면 6,000 받으면서 3,000 받을 때와 같은 여유를 느낀다. 숫자만 커졌을 뿐 구조가 안 바뀐 거다.
비상금이 먼저다
재테크 유튜브를 보면 "이 종목에 투자하라", "이 ETF를 사라" 같은 이야기가 많다. 근데 투자보다 먼저 해야 할 게 있다. 비상금.
갑자기 회사가 구조조정을 하면? 건강 문제로 6개월 쉬어야 하면? 월급의 3~6개월치를 비상금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이건 투자 수익률 0%짜리 돈이다. 이자도 거의 안 붙는 통장에 그냥 놔두는 돈. 근데 이 돈이 있으면 커리어 결정을 할 때 "당장 돈이 필요하니까"가 아니라 "내 성장에 맞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금융 칼럼니스트가 빚에 대해서도 쓴 적이 있다. 빚의 진짜 비용은 이자가 아니라 유연성의 상실이라고. 50년의 인생 동안 경기 침체, 건강 위기, 커리어 전환 같은 큰 충격이 올 확률은 100%에 가깝다. 빚이 없고 비상금이 있으면 이 충격을 견딜 수 있다. 빚이 있으면 작은 충격에도 무너진다. 500년 넘게 살아남은 일본의 오래된 기업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는가? 현금을 넉넉하게 쌓아두고 빚을 지지 않는 거라고 한다.
개발자의 비상금은 단순히 생활비의 문제가 아니다. 커리어의 자유도다. 비상금이 6개월치 있으면, 마음에 안 드는 회사에서 "RSU가 아까워서" 버티지 않아도 된다. 면접을 보면서 "연봉 깎여도 이 팀에서 일하고 싶다"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사이드 프로젝트에 3개월을 투자할 여유도 생긴다. 돈이 있어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돈 걱정이 없어서 자유로운 거다.
투자보다 지출 관리
입사 초기 1년의 재무 상태는 참담했다. 월급이 들어오면 생활비로 나가고, 남는 건 없었다. 적금도 안 들었다. "나중에 해야지" 하다가 1년이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한 첫 번째 일이 지출 추적이었다. 앱으로 카드 사용 내역을 분류해봤다. 한 달 치를 보니까 어디서 돈이 새는지 보였다. 충동 구매가 문제였다. 야근하고 스트레스받으면 쿠팡에서 불필요한 걸 주문했다. 키보드 3개, 사용하지 않은 온라인 강의 2개, 한 번 쓰고 안 쓴 가젯들. 한 달 충동 구매 금액이 월급의 15%에 달했다.
두 번째로 한 건 자동이체 설정이었다. 월급이 들어오면 일정 금액이 자동으로 빠지게. "남으면 저축한다"가 아니라 "저축하고 남은 걸 쓴다"로 구조를 바꿨다. 이것도 뻔한 말이지만 효과가 확실했다. 행동을 바꾸려면 의지가 아니라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건 습관의 영역에서도 재무의 영역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투자는 조심스럽게 시작했다. 개별 주식은 하지 않는다. 시장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S&P 500 ETF를 매달 일정 금액씩 적립식으로 사고 있다. 수익률이 대단한 건 아닌데, 목표가 대박이 아니라 물가상승률을 이기는 거다. 투자에 시간을 많이 쓸 여유가 없으니까, 가장 단순한 방법을 택한 거다. 투자에 쓰는 시간을 코딩 실력을 올리는 데 쓰는 게 장기적으로 더 높은 수익률이라고 생각한다.
퇴직연금도 방치하면 안 된다. DC형(확정기여형)이면 매달 적립금을 어디에 투자할지 직접 선택해야 한다. 처음에는 뭔지도 모르고 원리금보장형(사실상 예금)으로 놔뒀다. 6개월 뒤에야 "이걸 그냥 놔두면 물가상승률도 못 따라간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TDF(Target Date Fund)에 넣고 있다.
연봉 협상에 대해
첫 직장의 연봉은 협상이랄 게 없었다. 제시된 금액을 받았다. "이 금액에서 조율이 가능한가요?"라는 한마디를 못 했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마음이 컸고, "돈 얘기를 하면 나쁜 인상을 주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두 번째 이직에서는 달랐다. 현재 연봉과 시장 가치를 조사했다. 동일 연차, 동일 기술 스택의 다른 회사 보상 범위를 파악했다. 그리고 면접 과정에서 보상에 대해 먼저 물어봤다. "이 포지션의 보상 범위가 어떻게 되나요?"
돌아온 답에서 기본 연봉, 사이닝 보너스, RSU, 연차 보너스를 분리해서 봤다. 기본 연봉만 보면 비슷해 보이는 두 회사가, 총 보상으로 보면 30% 차이 나는 경우가 있다. RSU를 많이 주는 대신 기본 연봉을 낮추는 회사도 있고, RSU 없이 기본 연봉과 보너스로 가는 회사도 있다.
"돈보다 성장이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맞는 말이지만 함정이 있다. 성장과 적정 보상은 대립하지 않는다. 좋은 팀에서 좋은 기술을 쓰면서 적정한 보상을 받는 게 가능하다. 그리고 그걸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 "성장이 중요하다"가 "돈은 중요하지 않다"가 되면 안 된다. 둘 다 중요하다.
다만 연봉만 보고 이직하면 위험하다. 동기 중 하나가 연봉을 30% 올려서 이직했는데, 3개월 만에 나왔다. 매일 야근, 코드 리뷰 문화 부재, 산더미 기술 부채. 연봉은 올랐지만 번아웃이 왔고, 다시 이직하면서 프로필에 3개월짜리 경력이 남았다. 연봉 30% 인상이 3개월 만에 경력 오점으로 바뀐 거다.
돈 얘기를 하자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돈 얘기를 더 편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돈 얘기는 속물적이다"라는 인식이 있는 것 같은데, 돈은 노동의 대가다. 내가 만드는 프로덕트가 회사에 수익을 가져다주고, 회사는 그 수익의 일부를 나에게 지급한다. 이 관계에서 적정한 보상을 받고 있는지 고민하는 건 당연하다.
특히 같은 역할이 회사에 따라 3~4배 차이 나는 업계에서, 자기 시장 가치를 모르는 건 손해다. 세 번째 층의 보상을 받을 실력이 있는데 첫 번째 층에서 "여기도 괜찮은데"라고 안주하고 있을 수 있다. 정보가 없으면 이 사실 자체를 모른다.
돈이 전부는 아니다. 근데 돈이 중요하지 않은 척하는 것도 건강하지 않다. 부자처럼 보이려고 돈을 쓰는 것도, 돈을 무시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불안해하는 것도 둘 다 돈과의 건강하지 못한 관계다.
돈의 진짜 가치는 물건을 사는 능력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통제권이다. 비상금이 있으면 마음에 안 드는 회사를 떠날 자유가 생긴다. 지출이 적으면 연봉이 낮아도 불안하지 않다. 투자가 꾸준히 쌓이면 언젠가 "일하고 싶어서 일한다"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월급날이 되면 통장을 확인하고, 자동이체가 잘 됐는지 보고, 투자 수익률을 잠깐 확인한다. 5분이면 끝나는 루틴. 이 5분이 10년 뒤의 자유를 만든다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