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에 처음 갔을 때 일이다. 발표가 끝나고 네트워킹 시간이라는 게 있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하는데, 나는 구석에서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서 슬랙을 확인하는 척하면서 30분을 버텼다. 그리고 그냥 나왔다.
밖에 나와서 "네트워킹을 해야 하는데 왜 못 하는 걸까" 자괴감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한테 먼저 다가가서 "안녕하세요, 저는 프론트엔드 개발자인데요"라고 말하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팀 회식에서도 이미 아는 사람 옆에만 앉는 타입이다. MBTI 검사를 할 때마다 I가 90% 넘게 나온다.
그러다 1년쯤 지나서 깨달은 게 있다. 내가 못 하는 건 "네트워킹"이 아니라 "네트워킹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행위"였다. 명함을 돌리고, 자기소개를 하고, 약한 유대를 넓게 만드는 그 방식. 나한테는 그게 안 맞았을 뿐이다. 관계를 만드는 방법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디스코드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 일
어느 날 디스코드 프론트엔드 커뮤니티에서 누군가가 질문을 올렸다. Next.js에서 SSR과 CSR 사이의 하이드레이션 미스매치 에러를 해결하지 못하겠다는 거였다. 에러 메시지를 붙여놨는데, 내가 2주 전에 똑같은 에러를 겪고 해결한 적이 있었다. 원인은 Date 객체가 서버와 클라이언트에서 다른 타임존으로 렌더링되는 거였다.
10분 정도 들여서 답을 적었다. 에러의 원인, 내가 시도했던 것들, 최종 해결 방법, 그리고 비슷한 케이스에 대한 공식 문서 링크까지. 별생각 없이 적은 거였다.
그 사람이 고맙다고 DM을 보내왔다. 거기서 끝났어야 하는데, 우연히 같은 스택을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Next.js + TypeScript + Tailwind. 가끔 기술적인 질문을 주고받게 됐다. 3개월 정도 그렇게 지냈다. 그러다 6개월쯤 후에 그 사람이 연락을 했다. "우리 회사에서 프론트엔드 시니어를 뽑고 있는데 혹시 관심 있어?" 레퍼럴이었다.
이게 네트워킹이다. 명함을 돌린 게 아니다. 컨퍼런스에서 자기소개를 한 게 아니다. 누군가의 질문에 진심으로 도움이 되는 답을 적었고, 거기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만들어졌고, 6개월 뒤에 기회가 왔다.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게 네트워킹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받은 좋은 기회들은 대부분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 적이 있어서" 생긴 거였다. 이직 레퍼럴, 사이드 프로젝트 초대, 기술 스터디 제안. 전부 내가 먼저 요청한 게 아니라, 관계가 있는 사람이 나를 떠올려서 연락해온 거였다.
이걸 의식적으로 하는 개발자가 있다. 테스팅 라이브러리로 유명한 한 개발자가 대표적이다. 이 사람은 커리어 자체를 "다른 사람이 테스트를 더 잘할 수 있게 돕는 것"으로 만들었다. 오픈소스를 만들고, 블로그를 쓰고, 무료 강의를 제공하고. 이 사람이 "네트워킹"을 한 적은 아마 거의 없을 거다. 근데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이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수만 명이면, 그 중 일부는 자연스럽게 관계가 된다.
물론 이 정도 규모로 할 필요는 없다. 핵심은 원리다. 네트워킹의 본질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명함을 돌리면서 "나중에 도움받을 수 있겠지"라고 기대하는 건 순서가 반대다. 먼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면, 관계는 따라온다.
어떤 블로거가 인간관계에 대해 이런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에 대해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말하라." 칭찬도 도움의 한 형태다. 누군가의 블로그 글이 좋았으면 댓글을 달아라. 누군가의 오픈소스가 유용했으면 깃허브에 스타를 누르고,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뭐가 좋았는지 이슈에 적어라. 이 작은 행동들이 쌓이면 존재감이 된다.
온라인에서 먼저, 오프라인은 나중에
내향인한테 온라인이 훨씬 편하다.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생각할 시간이 있다. 오프라인에서 대화하면 즉석에서 반응해야 하는데, 온라인에서는 질문을 보고 5분 동안 생각하고 답을 적을 수 있다. 이 5분이 답의 질을 완전히 바꾼다.
둘째, 자기 페이스대로 할 수 있다. 오프라인 밋업에 가면 2시간 동안 계속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한다. 온라인에서는 에너지가 있을 때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지치면 그냥 나가면 된다. 아무도 눈치 안 준다.
셋째, 기록이 남는다. 디스코드에서 좋은 답변을 하면 그게 저장된다. 나중에 같은 질문이 나오면 누군가가 내 답변을 인용한다. 그러면 또 사람들이 내 닉네임을 인식하게 된다. 오프라인에서 한 좋은 대화는 두 사람의 기억 속에만 남지만, 온라인에서 한 좋은 답변은 수백 명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전략을 "온라인 먼저, 오프라인 나중에"로 바꿨다. 디스코드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 사람들과 온라인으로 관계를 만들고, 충분히 편해진 후에 오프라인에서 만난다. 온라인에서 이미 대화를 나눈 사람과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공통 화제가 이미 있고, 서로의 관심사를 이미 아니까.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안녕하세요, 저는..."을 하는 것과, 온라인에서 3개월 대화한 사람한테 "오프라인에서는 처음이네요"를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난이도다.
학습한 걸 공유하는 것도 관계다
"배운 걸 공유하라"는 조언이 있다. 이걸 다루는 글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공유의 첫 번째 수혜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3개월 후의 나 자신"이라는 거다. 블로그를 쓰거나,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거나, 코드 스니펫을 공유하는 건 일단 자신의 학습을 정리하는 행위다. 거기에 부수적으로 관계가 따라붙는다.
기술 블로그를 시작한 건 네트워킹 목적이 아니었다. 그냥 배운 걸 정리하고 싶었다. 근데 꾸준히 쓰다 보니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저도 같은 문제 겪었는데 도움됐습니다"라는 댓글 하나가 생각보다 큰 동력이 됐다. 댓글에 답을 달고, 그러면서 대화가 시작되고, 가끔 DM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게 내향인한테 맞는 관계 형성 방식이다. 콘텐츠를 매개로 한 관계.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아이디어 대 아이디어로 시작하는 관계. 내 글에 공감한 사람이 말을 걸어오는 거니까, 이미 공통 관심사가 확보되어 있다. 어색하게 화제를 찾을 필요가 없다.
깊은 5명 vs 얕은 100명
외향적인 사람들은 행사에 가서 20명과 명함을 교환하고, 20명 모두와 적당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나는 그게 안 된다. 대신 5명과 깊게 아는 사이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솔직히, 커리어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건 그 5명 쪽이었다.
온라인에서 자주 대화하던 분이 있었다. 같은 기술 스택을 쓰는 분이었는데, 기술 관련 고민을 주고받다가 나중에 오프라인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미 온라인에서 신뢰가 형성되어 있으니까 만남이 자연스러웠다. 이 분이 나중에 이직할 때 "우리 회사에 자리가 열렸는데 관심 있어?"라고 연락을 줬다. 또 다른 분은 블로그 댓글로 알게 됐다. 내 글에 구체적인 기술 질문을 달았는데, 답을 하다 보니 깊은 기술 토론이 됐다. 그 후로 정기적으로 기술적 고민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이런 관계는 "네트워킹 이벤트에 참석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시간을 들여서, 진짜 기술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면서 만들어지는 거다.
회사 안에서의 관계
밖에서만 관계가 있는 게 아니다. 회사 안에서도 다른 팀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회사 내부 슬랙에 #frontend 채널이 있었다. 여러 팀의 프론트엔드 개발자들이 모여 있는 채널인데, 처음에는 눈팅만 했다. 그러다 내가 아는 질문이 올라오면 답을 달기 시작했다. "이 에러는 이런 이유로 나오는 건데, 이렇게 하면 해결됩니다." 짧은 답변. 10분 투자.
이걸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아 이 닉네임 자주 보는데"라고 인식되기 시작했다. 다른 팀에서 프론트엔드 관련 미팅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성능 이슈를 겪고 있었는데, 내가 비슷한 문제를 해결한 경험이 있어서였다. 미팅에서 경험을 공유하고, 그 팀과 관계를 만들었다.
"네트워킹"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냥 내가 아는 걸 공유한 거고, 그게 도움이 된 거고, 도움을 받은 사람이 나를 기억한 거다.
오프라인에서 살아남는 방법
그래도 오프라인 행사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회사에서 보내거나, 꼭 가야 하는 컨퍼런스가 있으니까. 몇 가지 생존 전략이 있다.
혼자 가지 않는다. 아는 동료를 한 명이라도 데리고 간다. 둘이서 발표 내용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면, 옆에 있던 사람이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저도 같은 이슈 겪었는데요"라고. 혼자서 모르는 사람한테 다가가는 것보다 1000배 쉽다.
발표자한테 1:1로 다가간다. Q&A 시간에 손을 드는 건 어렵지만, 발표 끝나고 개인적으로 다가가서 "발표 잘 들었는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라고 하는 건 훨씬 낫다. 1:1이니까 부담이 적고, 공통 관심사가 이미 있으니까 화제를 찾을 필요도 없다.
전부 참여하지 않는다. 8시간짜리 컨퍼런스에서 8시간 동안 사람들 틈에 있는 건 무리다. 듣고 싶은 세션만 듣고, 점심시간에 30분 혼자 산책한다. 그래야 오후를 버틸 수 있다. 내향인의 에너지는 유한하다. 배분이 필요하다.
네트워킹이라는 단어를 버려라
결론은 이거다. "네트워킹을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라. 대신 "특정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자"로 바꿔라.
명함 100장을 돌리는 게 네트워킹이 아니다. 디스코드에서 누군가의 에러를 10분 동안 같이 디버깅해주는 게 네트워킹이다. 블로그에 내가 삽질한 경험을 적어서 같은 실수를 할 뻔한 사람의 시간을 아껴주는 게 네트워킹이다. 회사 슬랙에서 다른 팀의 질문에 답을 달아주는 게 네트워킹이다.
내향인의 강점이 여기에 있다. 대화를 많이 하지는 않지만, 한번 대화하면 깊게 듣는다. 넓게 퍼뜨리지는 못하지만, 한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다. 많은 사람에게 이름을 알리지는 못하지만, 소수에게 "그 사람은 진짜 도움이 됐다"는 기억을 남길 수 있다.
그 기억이 6개월 후에 레퍼럴이 되고, 1년 후에 프로젝트 초대가 되고, 2년 후에 커리어를 바꾸는 기회가 된다. 네트워킹 이벤트에서 받은 명함이 아니라, 진심으로 답해준 디스코드 메시지 하나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