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회사에 입사할 때 연봉 협상을 하지 않았다. 합격 통보와 함께 제시된 금액을 보고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게 협상이 가능한 거라는 걸 몰랐다. 정확히는 알았지만 "신입이 무슨 협상"이라고 생각했다.
이직할 때 처음으로 연봉 협상이라는 걸 했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이 있다.
시장 가격을 모르면 시작도 못 한다
오퍼를 받고 "희망 연봉"을 물어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 적정 연봉이 얼마지?"였다.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현재 연봉에 10~20% 더하면 되나? 아니면 시장에서 내 경력이면 얼마를 받는 게 맞나?
여기서부터 조사가 시작됐다. 개발자 연봉 관련 데이터를 찾아봤다. 블라인드, 잡플래닛, 개발자 커뮤니티의 연봉 공유 글. 문제는 데이터가 정확하지 않다는 거다. 같은 "2년 차 프론트엔드"라도 스타트업과 대기업은 다르고, 서울과 지방이 다르고, 도메인에 따라 다르다.
그래도 대략적인 범위는 파악이 됐다. 내 경력, 기술 스택, 회사 규모를 기준으로 하한선과 상한선을 잡았다. 이걸 모르면 상대가 제시한 금액이 높은 건지 낮은 건지 판단이 안 된다. 감으로 "좀 적은 것 같은데?" 하는 것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시장 대비 하위 20%인데"라고 아는 건 다르다.
동기 몇 명한테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연봉을 직접 묻는 건 좀 민감하지만, 신뢰하는 사이에서는 가능했다. "너 이직할 때 얼마 정도 받았어?" 하고 물어봤는데, 의외로 솔직하게 알려줬다. 이 정보가 나한테는 가장 실질적인 기준이 됐다.
숫자 이전에 준비할 것들
연봉 협상에서 숫자를 말하기 전에 해야 할 게 있다. "왜 이 금액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만드는 거다.
나는 이직 면접에서 한 번 실수를 했다. 희망 연봉을 물어봤을 때 "현재 대비 20% 인상"이라고 말한 거다. 면접관이 "왜 20%인데요?"라고 물었을 때, "그 정도는 올라야 이직 의미가 있어서요"라고 답했다. 돌이켜보면 최악의 답변이었다. 이건 "내가 받고 싶은 금액"이지 "내가 받을 만한 금액"에 대한 근거가 아니다.
그 뒤에 다른 회사 면접에서는 접근을 바꿨다. 나의 가치를 설명했다.
"현재 회사에서 결제 시스템 리뉴얼을 주도했고, 성능 최적화로 LCP를 1.2초까지 줄인 경험이 있습니다. 프론트엔드뿐 아니라 API 설계에 대한 이해도 있어서 백엔드 팀과 효율적으로 협업할 수 있습니다. 유사 경력 기준으로 시장에서는 이 정도 범위의 보상을 받고 있고, 저도 그 범위 안에서 논의하고 싶습니다."
구체적인 숫자를 바로 꺼내지 않고, 먼저 자기가 어떤 가치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말한 뒤에 협상에 들어가는 거다. 이걸 하려면 평소에 자기 실적을 정리해놓는 습관이 필요하다. 나는 이걸 이직 준비하면서 뒤늦게 깨달았고, 지금은 분기마다 내 주요 작업과 결과를 노션에 기록하고 있다.
먼저 숫자를 말하지 않는 게 유리할까
"절대 먼저 숫자를 말하지 마라"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먼저 말하면 불리하다고. 이게 맞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었다.
첫 번째 오퍼에서는 회사 쪽이 먼저 금액을 제시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낮았다. 근데 "먼저 말하면 불리하다"는 말만 기억하고 카운터 오퍼를 안 했다. 그냥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만 했다가 며칠 뒤에 전화가 왔는데, "결정하셨나요?" 결국 받아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카운터 오퍼를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였다. 회사 입장에서도 협상은 당연한 과정이니까.
두 번째 오퍼에서는 다르게 했다. 회사에서 금액을 제시했을 때, 하루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다음 날 전화했다. "제안해주신 금액 감사한데요, 제 경력과 역할을 고려하면 이 정도면 맞을 것 같습니다"라고 내가 원하는 금액을 말했다. 제시 금액보다 15% 정도 높은 숫자였다.
순간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엄청 길게 느껴졌다. 거절당할 것 같은 두려움. 근데 답은 "확인 후 연락드리겠습니다"였고, 이틀 뒤에 내가 말한 금액에서 약간 조정된 수준으로 최종 오퍼가 왔다. 원래 제시 금액보다 10% 정도 올랐다.
연봉만이 전부가 아니다
협상 과정에서 배운 건, 보상은 연봉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한 회사에서 연봉은 좀 낮았는데, 스톡옵션을 제안했다. 초기 스타트업이라 회사가 잘 되면 가치가 클 수 있다고. 근데 반대로 망하면 휴지 조각이다. 이걸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
다른 회사에서는 연봉은 비슷했지만 복지가 달랐다. 재택근무 가능 여부, 교육비 지원, 장비 지원, 연차 일수. 이런 것들을 돈으로 환산하면 꽤 차이가 난다. 매일 출퇴근에 1시간 반을 쓰는 것과 재택으로 그 시간을 아끼는 것. 이건 돈으로 계산하기 어렵지만 삶의 질에 직결된다.
연봉 협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제로는 "전체 보상 패키지 협상"이다. 연봉 자체를 올리기 어렵다면 다른 부분에서 협상할 수 있다. "연봉은 이 정도로 하되 사이닝 보너스를 받을 수 있을까요?" 같은 식으로.
현재 회사에서의 연봉 인상
이직할 때만 협상이 있는 게 아니다. 현재 회사에서 연봉 인상을 요청하는 것도 협상이다.
연봉 인상 시기에 팀 리드와 1:1에서 이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솔직히 엄청 어려웠다. 돈 얘기를 하는 게 한국 문화에서 좀 꺼려지는 면이 있다. 근데 안 하면 아무도 먼저 올려주지 않는다.
미리 준비했다. 지난 1년 동안 내가 한 주요 작업을 정리하고, 그 결과를 수치로 보여줬다. "결제 전환율 1.2% 개선", "LCP 3.2초에서 1.2초로 단축", "신규 기능 A, B, C 개발 및 운영". 이 리스트를 보여주면서 "이런 기여를 했으니 이 정도 인상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팀 리드가 "알겠어, 내가 위에 전달할게"라고 했다. 결과가 100% 내 희망대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무 말도 안 했을 때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그리고 이 대화를 한 것 자체가 "이 사람은 자기 가치를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감정을 분리하기
연봉 협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감정을 분리하는 거다. 내 가치를 숫자로 매기는 느낌이라 자존심이 걸린다. 낮은 금액을 제시받으면 "나를 이 정도로 보나?"라는 생각이 들고, 거절당하면 "내가 그만큼의 가치가 없나?"라는 생각이 든다.
근데 연봉 협상은 나의 인격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시장에서의 가격 협상이다. 중고 거래할 때 가격 흥정하는 것과 본질이 같다. 물건(나의 노동)에 대해 사는 쪽(회사)과 파는 쪽(나)이 적정 가격을 찾는 과정.
이렇게 생각하면 좀 덜 감정적이 된다. 거절당해도 "이 회사에서는 이 가격이 아닌 거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다. 내가 가치 없는 게 아니라 가격이 안 맞는 거다.
동료들과 연봉 얘기
한국에서는 연봉 얘기를 잘 안 한다. 직장 동료끼리는 더더욱. 근데 이게 오히려 정보 비대칭을 만든다. 회사는 시장 연봉 데이터를 다 알고 있는데, 지원자나 직원은 모른다. 불리한 구조다.
신뢰할 수 있는 소수의 동료끼리 연봉 정보를 공유하는 게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민감한 주제니까 강요할 수는 없다. 근데 나는 동기 2~3명이랑 솔직하게 공유하는 편이다. 그 정보 덕분에 내 연봉이 시장 대비 어느 수준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연봉 비교에 빠지면 안 된다는 거다. "쟤는 나보다 많이 받네"에 집중하면 끝이 없다. 같은 직급이라도 역할, 성과, 입사 시기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게 당연하다. 중요한 건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내 가치에 맞는 보상을 받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다.
아직도 돈 얘기를 하는 건 편하지 않다. 아마 세 번째 네 번째 해도 긴장될 것 같다. 근데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말해주지 않는다는 거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입을 여는 것. 연봉 협상에서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건 결국 그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