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하반기, 내 Jira 보드에 할당된 티켓이 23개였다. 스프린트 하나에 23개. 누가 봐도 비정상인데 당시의 나는 그게 비정상인 줄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거다.
어쩌다 그렇게 됐냐면, 누가 뭘 부탁할 때마다 "네, 할 수 있어요"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팀 리드가 "이 기능 추가 가능해?" 하면 "네." 다른 팀 PM이 "이거 이번 스프린트에 끼울 수 있어?" 하면 "아 네, 해볼게요." 디자이너가 "여기 인터랙션 좀 바꿀 수 있을까?" 하면 "가능합니다." 매번 그랬다.
거절을 못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서. 주니어인데 안 된다고 하면 능력이 부족하다고 보일까 봐. 협조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찍힐까 봐. "팀 플레이어"라는 이미지를 지키고 싶어서. 결국 다 자존심과 불안의 문제였다.
23개의 티켓이 만든 재앙
2025년 10월 셋째 주. 내가 맡은 일의 목록을 적어봤다.
- 메인 프로젝트: 결제 플로우 리뉴얼 (프론트엔드 전담)
- 다른 팀 지원: 어드민 대시보드 차트 컴포넌트 3개
- 긴급 핫픽스: 프로덕션 결제 버튼 간헐적 미노출 건
- QA에서 넘어온 버그 리포트 7건
- 디자인 시스템 공유 컴포넌트 DatePicker 수정
- 신규 입사자 온보딩 문서 작성 (내가 자원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 코드 리뷰 밀린 거 4건
- 기술 블로그 글 하나 (이건 자발적으로 한다고 했다)
이걸 2주 안에 끝내야 했다. 하루에 10시간을 일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양이었다. 근데 당시에는 "야근 좀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야근으로 해결되는 양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감정이 먼저 움직였다.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해야지."
결과는 예상 가능했다. 결제 플로우 리뉴얼의 퀄리티가 떨어졌다. 엣지 케이스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QA에서 크리티컬 버그가 3개 나왔다. 특히 카드사별 결제 실패 핸들링이 빠져 있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일단 넘기고 다음 스프린트에 하자"고 했던 부분이었다. 어드민 차트 컴포넌트도 급하게 만들어서 반응형이 깨졌다. 모바일에서 차트 라벨이 겹쳤는데, 테스트할 시간이 없었다. DatePicker는 손도 못 대고 "다음 스프린트에 할게요"라고 넘겼는데, 그 다음 스프린트에도 못 했다.
가장 안 좋았던 건 팀에 대한 신뢰가 깎인 거다. 여러 일을 맡아서 열심히 했는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끝낸 게 없었다.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무리를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10월 스프린트 회고에서 팀 리드가 "이번 스프린트에 완료되지 않은 티켓이 많다"고 했을 때, 그 티켓의 절반이 내 것이었다.
팀 리드와의 1on1
11월 초 1on1에서 팀 리드가 물었다. "요즘 좀 힘들어 보여. 괜찮아?"
솔직히 말했다. 일이 너무 많다고. 근데 다 내가 할 수 있다고 한 거라 뭐라 말하기 애매하다고. 이걸 말하면서도 "혹시 무능하게 보이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됐다.
팀 리드가 웃으면서 말한 게 아직도 기억난다.
"네가 예스 할 때마다 사실 나는 좀 걱정이었어. 이게 진짜 가능한 건지, 아니면 그냥 거절을 못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내가 무리하고 있다는 걸 팀 리드도 알고 있었는데, 본인이 직접 "하지 마"라고 말하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경계를 설정하는 걸 기다렸다고 했다. 그게 성장이라고. 물론 나는 성장하지 못하고 터졌지만.
그때 들은 말 중에 하나가 지금까지도 맴돈다.
"거절은 '못한다'가 아니라 '지금은 이게 더 중요하다'라는 뜻이야. 우선순위를 정하는 거지, 협조를 거부하는 게 아니야. PM도 스프린트에 뭘 넣고 뺄지 우선순위를 정하잖아. 너도 네 업무에 대해 그걸 하면 돼."
머리로는 당연한 말이다. 근데 가슴에 와닿기까지 한참 걸렸다.
거절하는 법을 연습한 과정
처음부터 "아니요"라고 딱 잘라 말하는 건 무리였다. 나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연습했다.
1단계: 시간을 번다. 요청이 들어오면 바로 "네"라고 하는 대신 "확인해보고 답할게요"라고 말한다. 이게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들었다. 즉답하면 감정이 결정하는데, 30분만 시간을 두면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지금 내 플레이트에 뭐가 있지? 이걸 추가하면 뭐가 밀리지?" 이런 계산을 할 수 있다.
처음 이 방법을 쓴 날을 기억한다. 11월 첫째 주 수요일. 다른 팀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공통 모달 컴포넌트 좀 수정해줄 수 있어?" 했을 때, 입에서 "네"가 나오려는 걸 참고 "지금 하고 있는 작업 일정 확인하고 내일까지 답할게요"라고 했다. 돌아와서 캘린더를 봤더니 이번 주에 이미 할 일이 가득했다. 그래서 "이번 주는 어렵고, 다음 주 화요일부터 가능할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상대방은 "아 그래요? 그럼 다음 주에 부탁할게요"라고 했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2단계: 가능한 범위를 제시한다. "이거 이번 주까지 가능해?"라는 질문에 "이번 주는 어렵고, 다음 주 수요일까지는 가능합니다"라고 답하는 거다. 완전한 거절이 아니라 조건부 수락. 이러면 상대방도 일정을 조정할 여지가 생긴다. 진짜 급한 거면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게"라고 하고, 아니면 기다려준다. 어느 쪽이든 나한테는 좋다.
3단계: 트레이드오프를 명확히 한다. "이걸 하면 기존에 진행 중인 결제 건이 3일 밀리는데 괜찮을까요?" 이렇게 물으면 요청한 사람이 스스로 우선순위를 판단한다. 대부분은 "그러면 결제 건 먼저 해"라고 말한다. 내가 거절한 게 아니라 상대가 알아서 철회한 셈이다. 이게 한국 회사 문화에서 가장 효과적인 거절법이었다. 직접적으로 "안 돼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 세 가지만으로도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특히 3단계가 효과적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바쁜 거 아닌가 싶어도 구체적으로 뭘 하는지는 관심이 없으니까. 트레이드오프를 보여주면 "아 이 사람이 놀고 있는 게 아니구나"를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게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거다. 진짜 시간이 없으니까.
거절 이후 달라진 것들
12월부터 확실히 일의 양이 줄었다. 스프린트당 티켓이 23개에서 8~10개로 줄었다. 숫자만 보면 적어진 것 같지만, 완료율은 올라갔다. 양이 줄어드니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었고, 퀄리티가 올라갔다. PR 코멘트에서 "이 부분 깔끔하네요"라는 피드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이거 엣지 케이스 빠진 것 같아요"가 주된 피드백이었는데.
야근도 줄었다. 당연한 건데, 일이 줄면 야근도 준다. 11월에 매일 10시까지 있었는데 12월에는 7시 반에 퇴근하는 날이 생겼다. 7시 반 퇴근이 뭐가 대단하냐고 할 수 있는데, 매일 10시에 퇴근하던 사람한테는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경험이었다. 퇴근하고 밥 먹고 산책까지 할 수 있는 여유.
재밌는 건, 거절을 잘하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신뢰가 올라갔다는 거다. "이 사람이 할 수 있다고 하면 진짜 할 수 있는 거다"라는 인식이 생긴 것 같다. 예전에는 10개를 맡아서 6개를 어영부영 끝냈다면, 지금은 5개를 맡아서 5개를 깔끔하게 끝낸다. 어느 쪽이 팀에 더 가치 있는지는 명확하다.
1월에 팀 리드가 1on1에서 해준 말. "요즘 일 처리가 안정적이어서 좋아. 예전에는 진행 상황이 불투명했는데 지금은 예측이 돼." 이 한마디가 "네, 할게요"를 100번 말해서 받은 칭찬보다 가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거절이 편하지는 않다. 특히 상대방이 급해 보일 때, 그리고 기술적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일 때.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건 이기적인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리고 거절 후에 그 일이 다른 사람한테 가는 걸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가 맡았으면 그 사람이 안 해도 됐을 텐데. 이 미안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며칠 전에도 팀 리드가 기술 블로그 글 하나 써달라고 했을 때, 반사적으로 "네" 하고 수락했다. 사실 이번 달 일정이 빡빡한데. 집에 와서 캘린더를 보다가 "아, 또 그랬네" 싶었다. 거절 근육이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것 같다.
비행기에서 산소마스크를 본인부터 쓰라고 하는 이유. 내가 먼저 숨을 쉬어야 옆 사람도 도울 수 있다. 이걸 안다고 해서 바로 실천이 되는 건 아니다. 아는 것과 하는 것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