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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이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된 이유

March 14, 2026

careeressay

"워라밸 좋아요?"

면접에서 이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면접관이 살짝 웃으면서 "저희는 칼퇴 문화예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입사를 결정한 건 아닌데, 가산점이 된 건 사실이다.

입사하고 보니 칼퇴 문화는 맞았다. 6시 30분이면 사무실이 텅 빈다. 야근을 강요하는 사람은 없다. 회의도 5시 이후에는 잡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도 있었다. 전 회사에서 10시까지 야근하던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근데 3개월쯤 지나니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칼퇴하는데 왜 행복하지 않지?

칼퇴는 하는데#

6시 30분에 퇴근해서 7시쯤 집에 도착한다. 밥을 먹고, 좀 쉬고,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시간이 온다. 9시. 여기서 선택지가 생긴다. 공부를 할까, 사이드 프로젝트를 할까, 아니면 그냥 쉴까.

초반에는 공부를 했다. "일찍 퇴근하니까 자기계발 시간이 있네!" 하는 마음으로. 한 시간 정도 타입스크립트 심화 강의를 듣고, 알고리즘 문제를 풀고. 그런 루틴을 2주 정도 유지했다. 그러다 하루 빠지고, 이틀 빠지고, 결국 넷플릭스를 보면서 "내일부터"를 반복하게 됐다.

그러면서 죄책감이 들었다. 시간이 있는데 허비하고 있다는 느낌. 퇴근 후에 공부하는 동료의 인스타 스토리를 보면 조급해졌다. "나는 뭐 하고 있지?"

이게 워라밸의 함정이었다. 일하는 시간은 줄었는데, 퇴근 후 시간을 "생산적으로" 써야 한다는 압박이 생긴 거다. 결국 스트레스 총량은 비슷했다.

개발자 커뮤니티에서도 비슷한 말을 많이 한다. "퇴근 후에도 공부해야 살아남는다"는 식의 말. 물론 공부는 중요하다. 근데 이 말을 듣고 매일 밤 강의를 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면, 그게 워라밸인지 의문이 든다. 일하는 시간에 집중해서 일하고, 쉬는 시간에는 쉬는 것. 이 당연한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균형이라는 환상#

워라밸을 한국어로 풀면 "일과 삶의 균형"이다. 균형이라는 단어가 50:50을 떠올리게 한다. 매일 일 8시간, 삶 8시간. 완벽한 균형. 근데 현실에서 이런 날은 거의 없다.

프로젝트 마감 전에는 일이 80%다. 코드에 집중하고, 버그를 잡고, 배포를 준비하면서 퇴근 후에도 머릿속이 코드다. 반대로 프로젝트가 끝나고 여유로운 주에는 일이 40%쯤 되고, 나머지 시간에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친구도 만난다.

이게 "불균형"인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쁜 주에 야근하면 "워라밸이 무너졌다"고 느꼈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매일매일이 50:50이 아니어도 된다. 한 달, 한 분기 단위로 보면 나름 균형이 맞는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프로젝트 마감 때의 기억#

입사 6개월 차에 큰 프로젝트를 하나 맡았다. 결제 시스템 리뉴얼이었는데, 일정이 빡빡했다. 3주 동안 거의 매일 9시, 10시에 퇴근했다. 칼퇴 문화라고 했는데 이게 뭔가 싶었다. 팀 리드도 "이번 건 좀 타이트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솔직히 그 3주가 힘들었냐면, 물론 힘들었다. 근데 동시에 그때가 가장 많이 배운 시기이기도 했다. 결제 도메인의 복잡성을 이해하게 됐고, 에러 핸들링을 치밀하게 하는 법을 배웠고, 긴박한 일정 안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감을 잡았다. 칼퇴하면서 편하게 일하던 시기에는 얻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팀 리드가 "다음 주는 쉬엄쉬엄 해"라고 했다. 그 주에는 정말 가볍게 일하면서 일찍 퇴근하고 밀린 넷플릭스를 봤다. 그 한 주가 진짜 쉬는 느낌이었다. 바쁜 시기 이후의 여유가 주는 만족감은, 매일 6시 30분에 퇴근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거였다.

돌이켜보면 그 3주 동안 "워라밸이 무너졌다"고 불평할 수도 있었다. 근데 그 기간이 내 커리어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간 중 하나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직도 답을 완전히 찾지는 못했다.

야근이 문제가 아니라#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있다. 나는 야근을 찬양하는 게 아니다. 만성적인 야근, 상사의 눈치 때문에 하는 야근, 잘못된 일정으로 인한 강제 야근은 분명히 나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때로는 일에 더 몰입하는 시기가 있어도 괜찮다"는 거다. 커리어 초반에 성장에 투자하고 싶은 시기가 있다. 어떤 프로젝트에 진심으로 몰입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때 "워라밸이 무너지니까 안 돼"라고 스스로를 제한하는 건 오히려 기회를 놓치는 거라고 생각한다.

동기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20대 후반에 엄청 일했어. 주말에도 공부하고 사이드 프로젝트 하고. 30대 들어서는 좀 느슨하게 하고 있는데, 그때 쌓아놓은 게 지금 먹고산다." 이건 그 동기의 이야기고, 모든 사람한테 맞는 건 아니다. 근데 시기마다 비중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건 공감했다. 20대와 30대의 워라밸이 같을 수 없고, 싱글일 때와 가정이 있을 때가 다르고, 커리어 초반과 안정기가 다르다. "지금 이 시기에 나한테 맞는 비율"을 찾는 게 핵심이다.

운동이 바꾼 것#

워라밸에 대한 생각이 바뀐 데는 운동도 한몫했다.

회사 근처 헬스장을 끊었다. 처음에는 "건강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유였는데, 실제로 느낀 건 좀 달랐다. 운동을 하면 퇴근 후 시간의 질이 달라진다. 30분 웨이트 하고 나오면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이 있다. 하루 종일 코드와 슬랙에 시달린 뇌를 리셋하는 느낌.

운동을 안 하면 퇴근 후에 몸은 집에 있는데 머리는 아직 회사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버그 왜 그러지" "내일 스탠드업에서 뭐라고 말하지" 같은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운동을 하면 물리적으로 다른 걸 하니까 전환이 된다. 이게 워라밸의 "밸"에 해당하는 거 아닌가 싶다. 시간의 양이 아니라 전환의 질.

주 3회 정도 가려고 하는데 바쁜 주에는 1회도 못 갈 때가 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매주 3회를 강박적으로 지키는 것도 또 다른 스트레스니까. 재미있는 건,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 코드 짜다가 막힐 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운동 갔다 와야지"라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거다. 예전에는 해결될 때까지 모니터 앞에 앉아있었는데, 지금은 환기하고 오면 오히려 해결책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내가 찾은 나름의 방식#

지금 나는 이렇게 하고 있다.

바쁜 주에는 일에 집중한다. 퇴근 후 공부 같은 건 안 한다. 대신 잠을 충분히 자고, 다음 날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컨디션을 만든다.

여유로운 주에는 의도적으로 쉰다고 마음먹는다. 공부를 하든 운동을 하든 아무것도 안 하든, 그건 그때 하고 싶은 걸 한다. "생산적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을 버렸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쉬는 거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체크한다. "최근 한 달 동안 나는 어땠나?" 일만 한 것 같으면 다음 한 달은 좀 빼기로 한다. 놀기만 한 것 같으면 뭔가 배워보기로 한다. 매일이 아니라 큰 단위로 조절하는 거다.

정답은 없다#

워라밸에 대한 정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매일 6시에 퇴근하고 저녁 시간을 가족과 보내는 게 최우선인 사람이 있고, 20대에 커리어를 최대한 밀어붙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 둘 다 맞다. 문제는 남의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하는 거다.

SNS에서 "워라밸 최고" 글을 보면 부럽고, "미친 듯이 일해서 성공했다" 글을 보면 불안하다. 이런 글들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자기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을 잡는 게 제일 어렵다.

나도 아직 잡는 중이다. 지금은 이 정도로 괜찮은 것 같은데, 1년 뒤에는 또 달라질 수 있다.

얼마 전에 후배가 "선배는 워라밸 어떻게 하세요?"라고 물어봤다. 한참 고민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잘 모르겠다. 근데 매일 50:50 맞추려고 하면 오히려 힘들어지더라. 한 주 단위로 보는 게 편해." 후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저도 매일 맞추려다가 자책하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워라밸이라는 건 한 번 맞추면 끝나는 게 아니라, 상황이 바뀔 때마다 계속 조정하는 거인 것 같다. 균형이 아니라 조율에 가까운 것.